고깃국

2008. 05. 10.

누구라도 어떤 특정한 음식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있을텐데…내게도 그런 특별한 음식이 있다. 바로 고깃국이다.

어렸을 때 나는 밥먹을 때 책을 가져다 놓고 보는 습관이 있었는데(지금도 신문은 가끔 읽곤 한다), 이때 주로 읽던 책은 주로 ‘전기‘였다. 그때 읽은 책 내용 가운데 슈바이처 박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.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음식과 관련된 일화 때문이다. 그 책 앞부분, 그러니까 슈바이처 박사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.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억으로 옮겨보면 슈바이처는 어렸을 때 몸이 허약했는데, 늘 몸집이 크고 힘센 아이들한테 당하고 살았다고 한다. 그 이유가 궁금했던 슈바이처는 그 집이 부유해서 아이들이 항상 고깃국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다. 결국 슈바이처는 어머니를 졸라 어려운 형편임에도 고깃국을 먹고 결국 나중에는 힘센 아이를 이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.

고깃국을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낸 이야길수도 있겠고 각색된 부분도 있겠지만, 밥상 앞에서 책을 읽던 나에게는 이것이 마치 뽀빠이의 시금치처럼 정의로운 음식으로 느껴졌다. 그래서 지금도 고깃국을 먹을 때면 이 이야기와 내 어린시절이 겹쳐져 더 맛있게 느껴지고 기운이 들어차는 거 같다.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는 고깃국을 먹으면 내가 그 마치 그때의 슈바이처가 된 기분마저 든다.

오늘 식당에서 고깃국이 나왔는데 오랜만에 국을 참 맛있게 먹었다. 일부러 고기도 좀 많이 담아왔는데, 역시나 예전의 슈바이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. 아니, 생각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오늘도 여느때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었겠지만. 힘이 생겨, 힘이 생겨…이런 생각하면서.

그런데 식당 앞쪽에 켜져 있던 TV에서는 계속해서 ‘나쁜 소’ 이야기만 나오고 있었다. 난 그냥 맛있는 고깃국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TV를 보다보니 맛이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이었다. 언젠가는 나의 추억이 담긴 이 고깃국마저 잊혀지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었다. 이건 내겐 단지 맛있는 음식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. 어머니, 슈바이처가 함께 있는 내 기억의 한켠이 같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. 곧 집에 내려가는데 어머니한테 다시 고깃국을 끓여달라고 졸라야겠다.

- 가즈랑

고깃국 & 대화들

  1. 정말 많은 시사점을 주는 글이라는 생각입니다.
    어떤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이고, 일상적인 기억들에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(좀더 적절한 표현을 하자면, \'침투\'하여 \'파괴\'하는) 정부 정책... 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고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겠지요. 2008. 05. 11.
  2. 민노씨의 생각...

    고깃국 (가즈랑): 정치는 먼 곳에 있지 않고, 일상 속에 있다. 국가라는 이름으로 집행하는 어떤 정치 행위가 그 국가에서 사는 어떤 개인의 지켜져야 마땅할 추억과 기억을 적극적으로 파괴... 2008. 05. 11.
  3. 민노씨 // 미투에서도 핑백이 트랙백처럼 예쁘게 오네요. ^ ^; 남긴 의견 잘 봤습니다. 그런데, 저는 단지 기억만 사라지는 것일 뿐이겠지만, 생업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의 생활기반이 사라지는 경우는 얼마나 더 아쉬움과 미련이 남을지 가늠이 잘 안 됩니다. 2008. 05. 12.
  4. 그래서 자살하는 농민들이 생기는 겁니다.
    그냥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거죠.

    서글픕니다. 2008. 05. 12.
  5. 이정일 // 답글이 많이 늦어버렸네요.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게으른 제 탓입니다. 남겨주신 답글에서 느껴진 안타까움은 제게도 많이 느껴졌습니다. 2008. 05. 20.
  6. 저는 고깃국을 비롯 고기에 관련된 음식들 참 좋아하는데 요즘뭐 좀 심란하네요.-_-;;;;근데 요즘 포스팅 많이 뜸하시네요.저또한 뜸하게 들러 죄송스런 맘이지만말예요.ㅜㅠ 2008. 06. 26.
  7. 필그레이 // 이렇게 뜸한 곳에 와주신 것만도 저는 그냥 고마울 뿐이네요. ㅎㅎ 필그레이님의 블로그에는 자주 들러서 눈팅을 하곤 하는데, 흔적을 남기는 경우는 적어서 저도 죄송한 마음이;;; 2008. 06. 26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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